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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칼럼
축의 시대(중국-1)
기사작성 : 2016-12-25 16:42:24
김태원 기자 tai0913@hanmail.net

 [시사터치 김태원 칼럼] = 이 시기에 갑자기 사상의 폭발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한 이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였습니다. 우리가 인류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시기에 등장하였고 그들이 펼친 가르침은 인류의 사상세계의 원천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혹자는 현재 물질문명이 엄청난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축의 시대에 도달한 정신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도대체 이러한 현상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러나 철학자의 관점과 역사가의 관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역사학에서는 철기문명의 도래를 들고 있습니다.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높은 농업 생산력을 통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하였으며 잉여 생산물이 늘어나면서 이를 둘러싼 교역과 전쟁이 빈발하게 발생하게 됩니다. 청동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드는데 철보다 매장량이 훨씬 적지만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철보다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청동기는 누구나 사용할 수 없는 귀한 금속으로 실용적인 용도로도 사용되었지만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도로 더 중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농기구는 여전히 나무와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였으며, 따라서 생산성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의 청동기 유물은 한국사에서 보이듯이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실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일종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도 쓰였습니다.

 그러나 철기는 매우 널리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철을 제련할 수 있게 되면서 철기의 사용은 청동기 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기원전 1500년경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인들이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한 이후로 본격적인 철기 시대에 들어가면서 가장 커다란 변화는 농업에 있어서의 높은 생산력의 결과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고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철기 이전에 인류의 수는 아직 적었고 따라서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은 인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지요. 문명이 발생한 이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혈연중심의 삶을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희박했기 때문에 교역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상호간에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기의 사용이후 인류는 농업을 비롯한 잉여 생산물의 증가에 따른 교역의 증대로 보다 원거리 교역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정복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아마도 교역망은 동시에 군대의 이동로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군대의 이동로를 따라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역과 전쟁은 서로 상극이지만 역사에서 보면 이 두 요소는 매우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령 상인의 입장에서는 시장이 클수록 많은 이익이 발생하지만 점진적인 교역으로는 시장의 확대는 한계가 있지만, 전쟁은 단기간 내에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는 나라마다 마차의 바퀴 사이의 간격(축거(軸距), 바퀴사이를 잇는 것을 축(軸)이라고 합니다)을 달리하였는데 이는 타국의 전차가 침입해오는 것을 막기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나라마다 축거를 달리했기 때문이지요. 좀 이해가 안되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좀 더 설명을 자세히 하자면 황토지대인 중국 화북지방은 마차의 바퀴 자국이 패인대로 그대로 굳어져 일종의 레일처럼 기능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이 축거를 통일시켰고 아울러 도로망을 정비한 것이죠. 당연히 이 도로망은 진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왕에 있었던 도로를 연결한 것입니다.

 황하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성립한 주(周)나라는 기원전 770년경 서쪽 지방의 견융(犬戎)의 침략으로 호경에서 동쪽의 낙읍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이를 경계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춘추시대라고 합니다. 주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며 주도권을 장악하려 합니다. 이 시기 이런 패자가 모두 다섯 나라가 있어서 보통 춘추 오패(五霸)라고 하지요. 주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봉건제(封建制)는 진시황이 본격적으로 실시한 군현제(郡縣制)와 더불어 이후 2000년에 걸쳐 통치 시스템으로 어떤 것이 보다 나은 제도인지를 놓고 많은 토론이 전개되었습니다. 왕실의 혈연들을 지방의 제후로 봉건하면서 주왕실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수많은 제후국으로 구성되었던 봉건제도가 동주시대에 접어들면서 흔들리게 됩니다.

 춘추시대부터 수많은 나라로 나뉘어진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통폐합하는 일이 전개되면서 이전의 혈연중심의 인재 등용은 타국에 비해 국력이 뒤처지게 되고 이윽고 보다 강한 나라에 병합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이전의 전통과는 다른 인재 등용방식이 등장하고 강한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농업 생산력 증대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게다가 기왕의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이를 정당화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런 요구에 직접적으로 화답하기도 하지만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논의도 활발하게 전개되지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가 성립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제자백가가 나타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이루어집니다. 도가의 노자와 장자, 유가의 공자와 맹자 및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약하였습니다. 이 때 제시된 사상의 풍요로움은 이후 중국 사상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학단(學團)을 형성한 것은 공자의 유가였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존칭(尊稱)에 해당하는 것이고 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를 학단(學團)이라고 하는데 이를 가(家)라고 하였습니다. 학단(學團)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을 닦았는데, 공자의 3천명이나 되는 제자들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또한 축의 시대의 사상가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답법(dialogue method)입니다. 이 시대에는 아직까지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에 의존하기가 어려웠기에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학문이 전수되었던 것이죠.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나 석가의 대기설법(對機說法)도 그렇거니와 논어는 공자와 제자의 문답을 수록한 어록입니다.

 공자에게서 처음으로 학단이 성립되었고 그 세력이 커지면서 여러 유파로 나뉘고, 나아가 유가를 비판하는 세력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신분제도는 왕 아래로 공(公), 경(卿), 대부(大夫)가 있고 그 밑에 사(士)가 존재하였습니다. 사는 지금도 용례가 전사(戰士)에 남아있듯이 본래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단 지배층인 이들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 군대로서 전쟁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신분을 상승하는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유가는 말단 지배층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사(士)계층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묵가는 피지배층인 수공업자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사상으로 평가받습니다. 다음회에서는 제자백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tai09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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