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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칼럼
축의 시대-(중국3)
기사작성 : 2017-01-21 23:41:44
김태원 기자 tai0913@hanmail.net

 [시사터치 김태원 칼럼] = 춘추전국 시대의 사회 체제와 신분제도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지배층은 주왕을 중심으로 제후, 경(卿), 대부(大夫), 사(士)를 포함한 그 일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후는 주왕실의 자제와 근친으로 구성된 일족 및 동맹부족 장들로써 이루어졌는데 주왕으로부터 분봉될 당시에 분봉지역과 거기에 거주하는 토착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봉지에 도착하면 성읍을 조성하여 정치·군사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국(國)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후 및 그 일족이 지배계층이 되었는데 이를 국인(國人)이라 하였습니다. 중국 고서에 많이 보이는 진인(晋人), 제인(齊人), 송인(宋人) 등의 명칭은 모두 이 국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사에도 삼국의 초기에도 많은 국(國)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삼한의 경우 마한 52국 진한과 변한은 12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구려안에는 초기에 송인국, 비류국 등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국의 계층 구조는 국인(國人)과 비국인(民)으로 분류하고, 족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국인의 평상시 향리조직은 동시에 공경(公卿)에 의해 통할되는 국의 하부통치조직이었고, 이는 또한 전투시는 공경을 장군으로 하는 전투조직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이 국인과 비국인을 합하여 인민(人民)이라고 합니다. 국을 지배하는 신분질서는 중앙에 천자가 있고 지방에 분봉된 諸侯와 그 밑에 경, 대부, 사의 하부 지배층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를 결합하는 지배의 원리는 작(爵)과 신의 권위 앞에 선서된 것으로 그 의식이 바로 예(禮)입니다.

 이러한 지배층에서 공(公)은 중요 국사를 최종 결정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 및 대표자로 융사공동체(군사·제사)의 공동체 수장으로 주술적 세계관, 조선신(祖先神)과 선공(先公)에 대한 제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결맹습속이라고 일컬어지는 춘추적 특수현상으로서의 맹(盟)의 성행은 그것을 어길 경우 내려질 신의 저주·보복을 강제적 구속력으로서 전제하거나, 춘추 중기 전후에 시작된 대구의 멸국치현 방식이 씨족적 전통을 지키려는 약소국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좌절되기도 했던 것의 배경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신의 가호를 보장받음으로써 국의 유지·번영을 기하기 위해서는 조선신에 대한 제사는 가히 필수적이었는데, 종묘에서 결맹의식을 비롯한 중요행사가 거행된 이유도 그곳이 조선신이 강림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죠. 그리하여 군사, 정치, 종교의 삼요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당시로서 가령 출전에 앞선 무기수여나 명령전달, 전쟁으로부터 귀환해서의 수상(授賞) 등도 종묘에서 거행되었던 것입니다. 이곳이 종교적 공간이었고 일종의 광장이었습니다. 아테네의 구조가 종교적 공간인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그 아래에 아크로폴리스라는 광장이 있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경·대부(卿․大夫)는 국의 권력집단을 구성하고, 주요관직을 세습하여 독점하던 씨의 종주(宗主) 및 유력자를 가리킵니다. 경은 대부 중에서 국의 최고 직책을 관장하는 존재로 유력 명문씨족의 장에서 나왔고 군사령관직을 차지하고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도식화시킨 지도에 보면 국(國)과 야(野)로 나뉘고 야는 국의 물적 기반에 해당하는데 야는 다시 도(都)와 비(鄙)로 구분됩니다. 야의 중심지역에 도(都)를 건설하고 경 대부가 거주하였고 비는 다시 하층 지배층인 사(士)계층에게 분봉되고 이들의 거주지는 비읍(鄙邑)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공(公)의 출정명령에 따라서 경, 대부는 사(士)를 중심으로 병단을 구성하고, 국군(國君)의 지휘하에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획득한 인구와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왕의 직접 지배가 가능하였습니다. 새로이 획득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종전의 성읍국가가 붕괴되고 영토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봉건제와 같은 이전의 간접적 지배방식에서 군현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는 직접적 지배방식은 각국의 통치자들에게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려 하였으므로 새로운 지식인층인 사(士)가 생겨났습니다. 사(士)는 신분에 관계없이 지식을 배경으로 정치에 참여하거나 참여하고자 하는 지식인 관료 및 관료 예비군으로 이들의 등장은 봉건적인 신분질서의 붕괴를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의 기원은 말단지족이 인구증가와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말단 지배층을 이룬 것입니다. 이들은 전사계층으로 춘추 전기의 국인층은 전사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함께 전투참여 자체를 특권이자 당연한 의무로 여겼습니다. 지배층이 전사집단이라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유사시에 전사로 변신하였으며,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출신이 크샤트리아로 전사계급에 해당합니다. 여담이지만 지배층에게서 전사라는 색깔이 엷어지는 시기가 보다 선진화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른바 문민화가 이루어지는데 그 선구적 문명권은 중국으로 이것이 가능하게 된 제도가 바로 과거제도였습니다. 근대 이전에 신분에 의하지 않고 실력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실시된 나라는 중국과 한국, 베트남이었다고 합니다.

 비에 거주하는 야인이 춘추 후기 신분제의 붕괴와 보병전의 대두 이전까지는 야인은 전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의 격화는 총력전 형태로 전개되면서 피지배층의 전투 참여가 늘어나게 됩니다. 이전의 전투가 전차전 중심이었지만 보병전의 비중이 커지면서 일반 평민의 전투 참가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사 계층은 공민적 위치에서 참정권을 행사하였고, 결맹을 통해 지배층과 결속하였습니다. 국외의 전지(田地)를 보유하고, 직접 농업 생산에 종사하면서 하급 관리로 경대부의 가재(家宰)·읍재(邑宰)등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죠. 이 계층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이 배출됩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 아테네의 참정권 확대과정과 비교하면 매우 흥미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제자백가와 백가쟁명, 백화제방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은 몇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소위 경학(經學)은 경전을 중심으로 내적 논리를 중시하면서 수많은 사상가들의 보다 정확한 주장이 무엇인지를 따진다면 역사는 그러한 사상이 등장하게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 중 사회경제적 배경을 중시하는 흐름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역사학 연구방법의 주된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야스퍼스가 이야기했던 축의 시대를 사상적 측면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그 사상이 나타나게된 배경에 비중을 두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춘추 전국이라는 동란(動亂)의 시대를 극복하고 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사상가들이 지향했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향점은 몇가지로 나뉘는데 크게는 두 갈래로 봅니다. 도가의 흐름과 유가와 묵가와 법가가 지향했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면 그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는 과정이 곧 해결방안을 찾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공자는 천하를 안정되고 유지하던 원리가 붕괴된 것을 춘추시대의 혼란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원리란 무엇인가? 공자는 그것을 상고(上古)시대의 제도로 보았고 주(周)의 제도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인 시대의 성인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졌고 공자가 그것을 육경(시, 서, 예, 악, 주역, 춘추)으로 정리한 것일까요? 청말의 사상가 캉유웨이는 요·순·문왕(文王) 등 3대(代)의 성세(盛世)는 공자가 옛것을 빌려 자신의 이상(理想)으로 하는 개혁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른바 탁고개제(託故改制)를 주장하며 이런 의미에서 공자는 개혁자라고 주장하였던 것이죠. 보통 유교를 복고주의적 성격이 짙다고 하지만 그때의 고(古)는 당대(今)의 사상가들에 의해 수정된 것이고 따라서 유교의 역사는 탁고개제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공자 이후에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이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였다는 의미에서 유교 경전에 주를 달고 해설을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에서 주목하는 것은 왜 그 시대에 경전이 새롭게 해석해야 되는지, 그러한 행위가 요구되고 수용되는 시대적 배경에 보다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유교는 크게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으로 변화되어 왔는데 이러한 변화는 중국사에서 역사적으로 커다란 분기점에 해당됩니다.

 유가의 반대편에 도가가 있습니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주장하였는데 춘추시대의 혼란의 원인은 다름 아닌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위(人爲)에 대하여 무위(無爲)를 주장하였는데 인간이 우주의 질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천하를 안정시키는 원리라고 보았죠. 따라서 인위를 합치면 위(僞)가 되는데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연(自然)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에 가까운 것으로 na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이후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합니다. 본래 뜻은 ‘저절로 그러한’의 의미라고 합니다.

 중국 문명은 매우 독특한데, 우리와 이웃하여 많은 영향을 받은 까닭에 이런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문명과 비교해본다면 가령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맥이 단절되고 현재 이 지역의 문명과는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상태이지요. 인도의 경우도 인더스 문명은 사라지고 현재의 문명과는 그 접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문명은 이후 그 흐름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에서 유일한 문명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탐구하는 주제입니다. 따라서 중국 문명을 바라볼 때 이러한 경이로운 생명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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