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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칼럼
축의 시대-(중국4)
기사작성 : 2017-01-27 17:59:57
김태원 기자 tai0913@hanmail.net

 [시사터치 김태원 칼럼] = 제자(諸子)란 여러 학자들이란 뜻이고,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하는데, 곧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펼쳤던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백가의 분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한 대 이후 일반적으로 제자백가를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도 단지 사회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가 무르익는 때였고 이러한 변화는 연쇄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변동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상의 발흥은 필연적이고 따라서 사상의 내용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사상이 잉태되던 시대적 배경을 함께 알아야만 합니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 잡기 위한 원리를 찾는데 집중하면서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변화는 거대하였기에 표면적인 정치적 대응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져왔습니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당시 과학지식의 한계로 많은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였고, 그들의 합리성도 경험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일반적인 주술성과 신비적 초월존재에 대한 신앙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연과 사물에 내재한 고유법칙을 확신하였고, 인간이 그 법칙을 인식, 지배함으로써 스스로 운명의 주체가 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의 시작으로 거론되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의 기원을 물질에서 구했다는 점에서 이성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의 탄생이고 유물론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4원소설로 정리가 되는데,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음양오행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 문명권에서도 지수화풍의 4대를 세계의 구성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축의 시대의 동서양의 사상의 공통점의 하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의 등장입니다.

 춘추시대의 사상가들이 도달한 ‘인간의 발견’과 인간본위의 무신론적(無神論的) 태도, 사물에 내재한 법칙·성질에 대한 합리적인 추구는 이 시대의 문화의 성격을 크게 특징짓고 있으며, 그 발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당시 수공업과 농업기술의 발전도 인식 대상인 물질이 갖는 고유성질에 대한 추구의 결과라 하겠으며 상업의 발전 역시 경제 유통질서의 법칙인식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전히 신비주의적 인식이 남아있었고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여전하였지만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는 확실히 진일보한 사회로 변화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학문은 정치·윤리 문제에 집중되어 치자(治者)의 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전통문화의 합리적인 재인식과 종전의 지식 체계의 정리가 이루어졌습니다. 각 지역의 선조신과 부족신의 전승과 설화가 삼황오제 신화로 정리되었는데, 황제(黃帝, 진시황이 처음 사용했다는 황제(皇帝)가 아니고 중국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사람입니다.)를 정점으로 한 성왕(聖王)·현신(賢臣)의 계보로 정리되어 오제(五帝)·삼대(三代)의 역사인식도 확립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중국 문명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다른 종족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중국적’ 문화가치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통의 재인식은 문자화(文字化)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전통을 절대적 권위로 인식하게 만들죠. 그 다음에는 그 권위에 가탁(假託)한 주장이 전개되고 이와 관련된 저술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됩니다. 서주사회의 사회규범인 예악, 문학의 전통인 ‘시(詩)’, 역사의 전승인 ‘서(書)’ 등이 이 시대에 재정리되었습니다.

 제자백가 사상은 고대 그리스와도 비교되는데 두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와도 비교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주왕조(周王朝)의 봉건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습니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다양하였습니다.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납니다.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였던 것으로 추론합니다. 이 시기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민회의 비중이 커지고, 따라서 민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이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논리학, 수사학과 같은 학문을 익힐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수요를 충당한 것이 소피스트들이었습니다. 인도의 경우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른바 축의 시대의 동서양의 역사의 전개는 매우 유사하게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춘추시대의 변화의 원인을 단선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느 한 요인의 변화는 다른 변화를 초래하고 그 변화가 처음 변화 요인에 다시 영향을 끼치면서 전개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변화를 보통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적 전개로 설명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변화의 출발점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라고 보는데,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능하게 했던 기술의 발전은 지배층의 수탈에 대한 일반민의 자구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산력의 증대는 연쇄적으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나아가 정치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거대한 사회 변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춘추시대에 철제 농기구와 시비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장기간 지속되었던 씨족공동체 질서 역시 생산력 발전에 따라 해체되고 그 대신 소농민 경영이 정착·보편화되어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씨족적 질서 속에 매몰되었던 개인이 해방되어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맺기도 했고, 종래 인간의 사유구조를 지배했던 주술적, 신정(神政)적 세계관은 이성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어 갔으며 그것은 마침내 제자백가로 꽃피웠다고 봅니다.

 사실 춘추시대의 변화는 지배층들에게도 위기의식을 불러왔습니다. 제후들은 생산력의 증대로 지산들의 부가 증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사회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봉건제가 무너지고 국가체제가 영역국가로 전환되면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관료가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와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자백가가 출현한 배경으로 제자백가는 학단(學團, 학문적 집단)을 중심으로 사상과 학문이 형성되었습니다. 학단의 시작은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활동이 국가에 의해 수용되어 설립된 최초의 학원은 직하학사(稷下學舍)로 전국시대 중기에 제나라 위왕때 수도 임치의 남문인 직문(稷門)밖에 설치한 것입니다. 제나라의 직문 밖에 학당이 있었으므로 이곳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곳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BC 6세기경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한 이오니아 학파가 있는데 이것이 학단과 유사하고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이 학원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학문의 전달방식과 관련하여 책이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고, 문자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승의 말씀에 대한 제자의 질문형식으로 지식이 전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도제적 학풍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백가로 알려진 일군의 학자와 그들의 학단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결과 종래 소수의 봉건귀족에게 독점되었던 지식과 학문이 일반 서인(庶人)층에 까지 확산되었던 것이죠. 종족과 씨족집단의 해체에 따라 집단의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학식과 능력을 통하여 신분상승을 모색하려는 개인의 강렬한 욕구가 곧 왕성한 문화창조의 의지로 연결되었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모색되고 난세수습을 위한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실력주의가 대두되었고 사인(士人)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것이죠.

/sisatouch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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