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집 : 2017-12-14 18:42 처음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고정칼럼
축의 시대-(중국5)
2017-02-11 21:48:53
김태원 기자 tai0913@hanmail.net


 [시사터치 김태원 칼럼] =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담당하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제자백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속한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배경등을 살펴봄으로써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춘추전국 시대의 사상가들은 주로 사인(士人) 계층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사(士)는 지배층의 말단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중간에 서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사인은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입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낡은 시대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역사적 분기점에는 그러한 과제를 담당하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합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말 고려초에 호족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여 고려 왕조의 건국을 이끌었고, 고려말 조선초에는 신진사대부라는 계층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사인은 군주에 대해서는 피치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 확보를 위해 군주권을 제약하였습니다.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제약할 수 있는 논리를 모색하였습니다. 군권(君權)의 절대성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제약할 수 있는 논리로 그들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논리였습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고 만인의 천하이며, 군주는 권력은 그 개인을 위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천하의 공의(公義)를 실현하고 만인에게 이(利)를 보장하기 위해 부여한 만큼, 군주는 그 권력을 이 공공목표에 부합되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군주 직위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요구하면서 선양(禪讓)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상현(尙賢)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왕도정치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생의 안정과 보호를 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삼아 군주의 절검(節儉)을 요구하고, 과도한 조세징수와 요역 징발에 반대하였습니다.

 사인층은 위민(爲民), 애민(愛民), 귀민(貴民) 등 강조하였는데, 이는 광의의 민(民)에 속한 사인층이 자신의 권익을 민의 권익이란 형식으로 주장한 것이죠. 이것을 민주주의 사상의 초보적인 형태 또는 적어도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치’를 주장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안정된 지배란 결국 피지배층의 건재를 전제로 유지된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은 명백하며, 특히 이것이 군주뿐 아니라 지배층 전체의 책임의식과 자기절제의 논리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의의 ‘민’에 속한 사인층이 자신의 권익을 ‘민’의 권익이란 형식으로 주장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전체 인민의 권익과 무관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사인은 일반민에 대한 치자 입장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 사회적 구조의 정당성과 구조의 상징인 군주의 존재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군주의 일족이나 총신이 아니라 정치 담당할 수 있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가 임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 행정의 고유한 기능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 분업의 강조로 이어집니다. 즉 노심자(勞心者․치인)와 노력자(勞力者·직접생산자) 분업 아래 노심자를 우대하였습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사인층은 군주와 더불어 국가를 운영하고 그 지향점은 민(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군주에 의해 등용되었지만 반드시 군주의 이익에 따르지 않고 인민을 위해 정치를 행하기 위해서는 나라가 군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인층이 주체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기반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뒷받침할 논리가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개념입니다. <예기> 예운편에서 공자의 입을 통해 설명하는 대동세계는 결코 무계급 사회가 아니라 현직자로 자임한 군주와 사인층의 계급적 지배, 그러나 온정적 지배를 정당화한 관념의 세계란 점에서 ‘사인(士人)’의 학(學)인 제자학의 논리적 이상이라고 합니다. 예운편의 천하위공 사상에서 묘사된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은 오히려 ‘천하위공’을 구현하는 주체, 즉 군주와 사인층의 관념적인 도덕적 책임에 불과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러한 논리의 전개로 사인층은 군주의 정치에 참여하면서 피치자의 입장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됩니다. 즉 세속적인 명리(名利)가 아니라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의 유무에 따라 사인층이 출사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군주는 사인의 협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인을 예우하는 식으로 군신 관계를 이념적으로 정립하였던 것이죠. 따라서 관리도 사대부와 백리(하급서리)로 구분하고사대부만이 사인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이제 사대부는 포괄적인 업무를 관장하고, 법의 본의나 사물의 원리를 체득하여 예를 통해 국가를 규제하게 됨으로써 군주의 공치자(共治者)로 격상되었습니다. 관리층의 이러한 구분은 후대에 사대부와 백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선출하는 전통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무원 선발에서도 직급에 따라 시험을 달리보고 호칭도 다름니다. 5급 공무원부터 호칭에 사무관, 서기관과 같이 관이 붙지만 6급 공무원부터는 붙지 않습니다.

 이제 제자백가의 논리전개를 살펴보고 통일과 전쟁의 논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백가가 이룬 인간의 발견과 그 한계에서 다루고 축의 시대 중국편을 닫으렵니다. 이어서 축의 시대의 그리스와 인도를 다루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 문화에서 논리학이 발달했고, 불교에서의 논리학은 인명론(因明論)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발달해있지만 중국의 춘추시대에도 논리학이 발달했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아테네는 민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격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논리학과 수사학이 발달하였는데,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도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유세(遊說)를 하였고, 인도에서 불교의 석가모니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 등과 같은 사상가들도 북인도 지방을 편력하면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학은 필수 학문이었고 축의 시대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논리학에 정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학파는 교사의 개인적인 권위만으로도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학파와의 논쟁에서는 객관적이고 논리성이 필요하였습니다. 언어의 정확한 개념과 사물의 이동(異同) 판별하는 류(類)개념의 확립, 유추법, 연역법, 귀납법 등과 같은 논리학이 발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혜시와 공손룡이 있습니다.그러나 그리스 소피스트에서 보이듯이 논리학은 언어의 유희에 빠질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논쟁은 궤변으로 흐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어느경우에나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기준을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기준으로 경험이나 선례 또는 공리성(功利性)과 같은 것이 입론의 준거가 되었습니다.

 제정일치의 사회에서는 신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 절대적 기준이 되듯이 춘추전국 시대에는 고성왕지사(古聖王之事)란 기준이 제시되었습니다. 자신의 입론이 곧 고(古)성왕의 ‘교(敎)’나 ‘법(法)’이란 주장으로 이러한 주장은 필연적으로 그 성왕의 시대를 완벽한 이상의 전형으로 미화하는 논리로 연결되었고,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현실개혁이 그 이상적인 과거의 재현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상고주의나 복고주의의 강조로 이어져 발전 개념이 상대적으로 결여된다는 약점이 있죠. 또한 사인층이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로서 제왕의 절대적 권한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조는 후에 유학이 어용의 학문으로 전락하는 원인이 됩니다.

통일과 전쟁의 논리와 선진(先秦) 제자(諸子)들의 이상적 국가상

 전국(戰國)란 말은 전쟁하는 나라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시대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혼돈의 시대였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 형성된 통일왕조를 달성해야 된다는 이상은 무엇보다 전쟁 종식의 염원의 발로였지만, 그 외로 나라별로 나뉘어진 경제 질서의 통합요구와 중국적 세계의 통합요구란 3가지 배경에서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배경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핵심일까요? 다수의 백성들은 전쟁의 종식으로 생명의 유지와 가족의 보호와 같은 것을 기대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천하일통(天下一統)을 촉진한 것은 경제 질서의 통합이었을 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상공업 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거상(巨商)들은 보다 커다란 시장의 출현을 위해 잘게 나뉜 당시의 시장을 통합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추진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의 시황제의 실제 아버지인 여불위는 당대의 거상(巨商)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면 지역적으로 수많은 나라로 나뉘었던 단계에서 점차 통합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 근세 절대주의 왕정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그 요인중의 하나였습니다. 국왕이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의 확보가 필요하였고, 상공업자인 부르주아지는 시장의 확대를 통한 이익의 증가를 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국왕과 시민계급이 손을 잡고 정치적으로는 왕권강화와 영토 통합을, 경제적으로는 국민경제를 지향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당시의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따라서 절대왕정은 귀족과 시민계급의 경쟁을 조정하는 균형위에 서있는 형태였습니다. 지금은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그 통합의 밀도가 점차 높아지겠지요.

 상․주시대에 이미 거대한 정치적 통합에 성공, 왕조체제를 장기간 유지한 역사적인 경험 역시 통일왕조의 이상을 당연한 전제로 인식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축의 시대의 다른 문명권과 매우 다른 측면인데, 그리스는 그리스 반도에 그리스인들이 이주하기 이전에 통일된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도시국가들이 동질적인 종족의식을 가지고 올림푸스 산에 모여 4년마다 축제를 열었지만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없었거나 있었어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를 하나로 통합한 것은 야만인으로 취급받았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국가별로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중해 문명권의 통일이라는 과제는 로마에 의해 달성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중국도 한에 의해 통일왕조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변방이었는데, 진(秦)나라도 서쪽의 변방에 위치한 나라였다는 점입니다. 한 문명권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은 문명권 중심에서 전래되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지만 전통이라는 중압감에서 어느정도 자유롭다는 이점이 있고, 중심지에서 수용되기 어려운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비교적 편견없이 채택하였고 이러한 측면이 통일을 달성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런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한국사에서 삼국시대 가장 변방이었던 신라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삼국 통일을 달성했고, 유럽의 중세도 변방의 게르만 족의 이동으로 열렸으며, 중국사에서 남북조 시대의 오호가 화북지방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서양 역사가들은 유럽 역사의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다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유럽에서의 옮겨간 중심축은 이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제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로 옮겨간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사의 중심이 동아시아일까요?

 당시 통일왕조의 이상은 새로운 모색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회복운동이란 측면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이것을 어떻게 재현할 할 수 있고, 또 어떤 형태와 방법으로 유지하느냐는 것은 제자(諸子)들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그러면 제자가 주장한 통일 방법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유가의 왕도론은 인정(仁政)을 실천하는 군주를 중심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민이 학정을 이탈하여 타국의 군주에게 귀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인정을 실천하는 군주가 1인일 때만 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인정을 실천하는 군주는 오직 1인이고 여타(餘他) 군주는 모두 폭군이란 조건을 당연한 전제로 설정하고 있는 점은 맹점입니다. 만약 인정을 실천하는 군주가 복수라면 천하통일을 불가능하며, 잘 해야 인정이 구현된 복수국가의 병존이 가능할 뿐이기에 인정에 의한 통일론이 통일론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인정론 자체에 있다는 점이 치명적 약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으로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하는 사상적 기반은 유가가 아니라 법가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유가는 통일을 달성하기에는 앞서 언급한 약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가의 입장은 통일 주체는 무력뿐만 아니라 인정을 구현할 수 있는 문덕이 겸비한 인자라는 힘의 논리와 도덕주의의 타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해마지 않던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폭군의 나라를 천을 대신하여 공벌(攻伐)하는 것이므로 무력의 대상은 백성이 아니라 폭군과 그 지지자들에 국한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천(天)이 유덕자에게 지상의 통치를 위임하였기 때문에 천명을 받은 사람들도 폭군을 무력으로 제거한 후에 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법치(法治)는 법의 강제력을 이용하여 군권(君權)을 정점으로 전시 체제를 확립하면서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백성을 창출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백성을 창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공수작제(軍功授爵制)를 실시하였습니다. 전국시대 진(秦)의 상앙(商鞅)은 국가에 대한 공로를 기준으로 신분질서를 재편성하면서 군공(軍功)을 가장 중시하였고, 심지어는 관직도 군공에 따라 부여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가치 중 군공을 우선시킨 것도 법치론과 전시체제의 불가분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덕치(德治)는 법조문에 우선하는 가치를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다양한 기준과 행동규범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선왕(先王) 또는 고성왕(古聖王)이 제정했다는 일정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 원리 및 규범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는 국가권력과 군권의 권위를 강제하고, 군주의 무제약성을 높이는 구실을 하여 법치보다 포괄적이고 획일적 통제를 요구하지요. 유가의 순자는 예치(禮治)를 강조하였는데 선왕의 규범으로 모든 풍속의 통일을 주장하였습니다. 예치를 강조한 순자가 “둘이 되면 의혹하기 마련이다, 천하에는 2가지 도(道)가 없고 성인에게도 양심(兩心, 두 마음)이 없다” 는 전제하에 “제후의 이정(異正)과 백가의 이설(異說)”을 극력 반대하였죠. 자신들이 주장하는 예․덕이 유일한 최고의 선이므로, 이것으로 모든 사상과 풍속이 획일적으로 통일돼야 한다는 입장으로, 이것은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자기 주장이나 일체의 이설(異說)을 이단시하는 사상적 편협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군주의 요구가 아니라 통일의 당위성을 전제로 제자(諸子)들이 무력에 의한 해방 전쟁의 논리를 용인하였던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군권(君權)의 절대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군권의 견제이론을 다양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제군주권의 용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전쟁은 이겨야한다는 냉혹한 현실이기에 사회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일사분란한 질서를 요구합니다. 다양한 사상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 유가로 통합되어 갑니다.

 제자백가의 개별사상은 경학(經學)의 영역으로 사상사가 아니라 사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서양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로 건너가겠습니다.

/yongmin3@daum.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시사터치>

이전화면 | 인쇄






회사소개    기사제보    광고문의    콘텐츠 이용문의    윤리강령
등록번호 : 대전 아00217 등록일 : 2014. 12. 12. 발행·편집인 : 이용민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준수
발행소 : 대전 유성구 유성대로 736번길 19(장대동) 넥스투빌 1002호 대표전화 : 070-8125-0306
이메일 : sisatouch@sisatouch.com Copyright 시사터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