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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에 대한 짧은 생각
기사작성 : 2017-03-07 12:26:49
김태원 기자 tai0913@hanmail.net

 [시사터치 김태원 기자] = 보수(保守)는 보호하고 지켜야 할 신념과 원칙이 있기에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고 수구(守舊)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원칙을 저버리는 사람이다. 둘은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왕조의 지배층인 많은 양반가의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심지어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사례는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예로 많이 언급된다. 그들은 대부분 조선 왕조를 다시 복원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 입장에 서있었기에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한 사회가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그 원리를 지키려고 한 보수주의자들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보수는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수구를 끌어들인 원죄가 있다. 해방 이후 보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친일 수구 세력과 손을 잡고 권력을 장악했다. 문제는 친일 수구 세력을 끌어들였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포섭되어 보수가 도리어 수구화 되어 버린 것이다. 법은 안정성을 우선시하기에 법치(法治)는 보수의 주장이어야 하고, 진보는 현재를 바꾸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사상에 있어서도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친근성이 있다. 근대 유럽 사회가 성립되던 18세기는 자유주의가 시대의 정신이었다. 그런데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중잣대를 가진 보수가 있는데 이러한 자기 분열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가 그만큼 왜곡되고 파행적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한 모순된 주장의 속내는 기득권 유지라는 수구적 가치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근대사회를 가능하게 한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자유평등박애이다. 이후 역사는 자유를 강조하는 흐름과 평등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나뉜다. 그 정치적 틀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이고 양극단에 극우의 파시즘과 극좌적 테러리즘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짝을 짓고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는 흐름과 함께한다. 근대 시민 혁명은 자유권을 쟁취하여 정치적 평등을 달성하였다면, 현재까지의 인류의 역사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인 경제적 평등을 향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기본적인 가치는 선후(先後)는 있을 수 있지만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가야 할 가치로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 둘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의 갈등과 전쟁의 내용을 보여준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한쪽이 다른 쪽을 부정하여 저지르는 제노사이드(genocide)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드는데 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히틀러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독일 국민이었다. 또한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선택한 상황을 만들어준 것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승리한 연합국의 결정이었다. 따라서 손쉽게 유대인 학살이라는 인류의 범죄를 히틀러 개인의 잘못으로 둔다고 독일 국민이, 유럽인이 면죄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유럽은 이러한 인류에 대한 범죄의 공범(共犯) 의식을 자각하고 철저한 반성을 통해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었다.

 오늘날 극단적인 대립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한반도이다. 남과 북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가 가져올 민족 공멸(共滅)의 위기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로 대표되는 세력이 저지른 국정농단으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어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지금은 촛불을 들고 최순실과 박근혜 일당이 저지른 행위를 단죄할 때이다. 그러고 나서 저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여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니 반성할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지 말자. 내 이웃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우리는 방관하지 않았는가? 이제 며칠 후 탄핵이 인용되면 우리는 승리에 도취할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어쩌면 최순실과 박근혜는 우리 민족을 위해 이 땅에 온 역행보살[逆行菩薩]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업(共業) 중생이다.

/sisatouch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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